꿈달의 독서 산책

지도를 따라가는 반 고흐의 삶과 여행, 반 고흐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꿈달(caucasus) 2021. 6.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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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를 따라가는 반 고흐의 삶과 여행, 반 고흐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우리에게 익숙한 화가 반 고흐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의 그림을 잡지나 미디어를 통해 자주 접해 왔지만 정작 반 고흐라는 사람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지 않다. 그림에 대한 정열이 대단했다는데...

 

책의 제목은 <지도를 따라가는 반 고흐의 삶과 여행>이다.

제목 그대로 반 고흐의 출생부터 그가 죽음이 이를 때까지, 그의 생애을 다룬 책이다. 반 고흐는 평생동안 유럽전역을 여행하며 그림을 남겼는데, 이 책은 그의 다양한 작품을 통해 고흐의 삶을 들여다보는 책이다.

 

 

고흐의 다양한 작품들과 배경이 되었던 장소와 도시, 자연풍경 사진들과 사연을 함께 수록하여 마치 내가 고흐의 곁에서 그와 함께 여행하는 듯 한 인상을 받았다. 고흐는 1853년 네덜라드의 브라반트 지방 준데르트 마을의 목사였던 테오도르 반 고흐와 그의 부인 아나 반고흐 사이에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불행하게도 부부의 첫째아들은 태어나자마자 죽었다고 한다.

 

그래서 반 고흐는 장남이 되었다. 밑으로 5명의 동생이 있었는데 그중 테오 반 고흐와 우애가 깊어 죽는 날까지 형제이자 정신적으로 각별한 친구가 된다. 고흐는 그가 죽는 1890년까지 테오에게 약 800통의 편지와 1,300점의 그림, 850점의 스케치를 남겼고, 오늘날 우리가 고흐의 생애를 돌아보는데 많은 참고자료가 되고 있다.

 

고흐는 37년의 짧은 생을 살면서 남들과는 다른 독특한 삶을 살았다.

그는 어린시절부터 다른 아이들보다 유독 외로움을 잘 타고 감수성이 남달랐다. 어린시절 학교에 잘 적응하지 못해 어머니에게서 그림수업을 받았는데, 이때 자연에 대한 사랑을 배우게 된 것 같다.

 

이 때문인지 고흐는 준데르트의 아름다운 전원풍경에 매료되어 혼자 멀리까지 자연속으로 산책을 다녀오기도 했다. 훗날 고흐는 정신병을 앓았던 시절에 테오에게 쓴 편지에 준데르트의 아름다운 자연풍경을 그리워하며 매일밤 꿈을 꾸곤 한다고 전한다.

 

고흐는 어린 시절 그림에 소질이 있었지만 천부적인 재능의 소유자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 역시 독립할 나이가 되자 직업을 구하기 위해 16살 되던 해 파리에서 삼촌이 운영하던 <구필화랑>에서 그림과 화구를 파는 일을 시작했다. 당시 유명한 화가들의 그림을 접할 수 있었던 고흐는 그림에 대한 매력에 흠뻑 빠지게 된다.

 

특히 판화그림을 좋아했다고 한다. 하지만 고흐의 괴팍한 성격과 손님에 대한 불친절함으로 네덜란드, 벨기에, 파리, 런던의 구필화랑 지점으로 전근을 가면서 산업혁명기의 생동감 넘치는 도시의 문화를 접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당시 고흐는 다양한 작품을 남긴다. 그가 다녀간 도시들의 풍경을 그린 그림을 자신의 안부와 함께 동생 테오에게 꾸준히 보냈다. 이후 고흐는 변덕스러운 성격 때문에 결국 구필화랑에서 해직되고 그 뒤로 아버지를 따라 목사가 되기 위해 신학공부를 시작한다.

 

하지만 라틴어와 고대 희랍어 공부가 너무 어려워 학업을 포기한다. 이 당시 신학공부를 포기한 자신에 대한 원망과 아버지와의 갈등으로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매우 심적으로 괴로워하였다.

 

목사를 포기할 바에 차라리 선교사라도 되고자 혼자서 네덜란드 보리나주로 떠나 가난한 광부들과 함께 지내면서 그들에게 설교를 하고 그들의 일상을 그림으로 남겼다. 당시 보리나주 사람들은 반 고흐를 "말이 없고 괴팍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신의 담요와 옷을 나눠줄 정도로 헌신적인 사람" 이었다고 한다.

 

고흐는 여러 여자들과 사랑에 빠지기도 하는데, 창녀부터 하숙집의 딸들까지 다양한 여인들을 짝사랑하게 된다. 물론 짝사랑이 아닌 경우도 있었지만, 결국 그 여인들과 결혼까지 이뤄지지 못했다.

 

그중 12살 연상이었던 마르홋 베헤만(아버지의 교회 전임 목사의 첫째딸)이라는 여성과 둘은 서로 사랑하였지만, 베헤만의 집안 반대로 결혼하지 못한다. 고흐가 첫번째 자살을 시도한 지 5년이 지나서도 이 여인에 대한 내용을 편지에 남길 정도로 베헤만에 대한 애정은 컷던 것 같다.

 

 

한편, 고흐는 자신의 자상화를 매우 많이 남긴 화가이다.

그 이유는 모델을 구할 돈이 없어 자신의 모습을 그렸기 때문이다. 반 고흐는 구필화랑을 그만둔 이후로 줄곧 아버지와 테오가 보내주는 용돈으로 생활을 했기 때문에 매우 가난했다.

 

밥을 굶는 일은 일상이었고 보내주는 용돈으로 화구와 모델료를 지급하면 그는 일상 생활을 거의 영위할 수 없을 정도였다. 또한 골수 파이프 담배 애연가였다. 때문에 그의 건강상태는 매우 좋지 못했다. 이와 같은 이유로 그는 모델을 구하지 못하자 자신의 얼굴을 그린 자상화를 많이 남겼는데, 파리에서 생활할 당시에만 25점의 자상화를 남겼다.

 

고흐가 파리에 왔을때 인상주의 미술을 접하게 되는데, 반 고흐가 그동안 사실주의에 심취했던 차라 점과 선으로 색을 표현하는 인상주의에 큰 기대를 가졌다고 한다. 하지만 인상주의 화풍에 큰 감흥을 받지는 못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가 파리에서 그린 25점의 자화상을 보면 시간이 흐를 수록 그동안 헤이그 학파의 어둡고, 회색풍의 화풍에서 점차 밝아지고 강렬한 색으로 채워지는 우리에게 익숙한 고흐의 독특한 화풍으로 점차 바뀌게 된다.

 

또한 파리에서 지내면서 훗날 유명한 화가가 되는 폴 고갱, 에밀 베르나르, 루이 앙크탱, 툴루즈 로트렉과도 친해지는 계기가 된다. 당시 이들은 모두 이름이 널리 알려지지 않은 가난한 화가들이었다. 빈센트는 그들을 당시 잘나가던 인상주의파 화가들에 빗대어 <작은 거리의 화가들>들이라고 불렀다.

 

폴 고갱과 반 고흐의 동거생활은 아주 유명한데, 그 이야기는 고흐가 번잡하고 복잡한 도시 파리를 떠나 남프랑스의 아를 지역으로 이사를 가며 벌어진 일이다. 고흐는 아를의 아름다운 전원 풍경에 매료되어 그곳에 정착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그는 일명 <노란집>이라고 불리던 작은 집을 구해 자신과 같은 처지의 화가들이 함께 생활하며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작업장으로 쓰이길 원했다. 몇해 지나 노란집에 그와 같은 여건이 마련되자 그는 폴 고갱을 초대해 함께 지내자고 제안했다.

 

몇달 뒤 폴 고갱이 도착하고 처음에 둘은 사이가 매우 좋았다. 하지만 점차 시간이 흐르자 그림에 대한 두 사람의 논쟁은 점차 격해지고 고흐는 정신적으로 탈진할 정도에 이르게 된다. 결국 고흐는 우울증에 걸리고 몇년 뒤 면도칼로 자신의 왼쪽 귀를 잘라버린다. 당시 고갱은 “고흐가 면도칼로 자기를 위협한다고 한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빈센트 반 고흐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히는 <별이 빛나는 밤>은 그가 고갱과 다툰 뒤 자신의 귀를 자른 사건 이후 생레미의 요양원에 있을 때 그린 것이다. 반 고흐에게 밤하늘은 무한함을 표현하는 대상이었고, 이보다 먼저 제작된 아를의 <밤의 카페 테라스>나 <론 강 위로 별이 빛나는 밤>에서도 별이 반짝이는 밤의 정경을 다루었다.

이 사건 후로 고흐의 우울증은 더욱 심해지고 결국 정신병까지 얻게 된다. 그는 환각과 환청에 시달려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당시 고흐는 정신병이 심해져 양초의 원료인 파라벤과 램프 연료를 먹는가 하면 물감과 물감유화제까지 집어 먹었다고 한다. 고흐가 이처럼 정신병을 앓아 고통스러운 세월을 보낼 당시 테오는 요 봉어르와 결혼을 하게 된다. 물론 고흐가 왼쪽 귀를 잘랐을때도 맨 처음 달려가 그를 돌본 것도 테오였고 병원비와 안부편지를 꾸준히 보낸 것도 동생인 테오였다.

 

테오만큼 형을 사랑한 이는 없었다. 하지만 테오 역시 당시 결혼생활을 시작했기 때문에 형을 자주 찾아가지 못했다. 고흐가 정신병원에 입원한지 2년 동안 동생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고 하니 고흐의 외로움과 고독이 상당했을 것이다.

 

고흐는 후에 상태가 호전되어 정신병원을 나와 오베르쉬르우아즈로 거처를 옮기게 된다.

그곳으로 가던 도중 파리에 들러 3일간 테오의 집에 머물게 되는데, 그의 일생 중 가장 행복했던 날 중의 하나가 바로 이때 테오부부와 조카(빈센트 빌럼)를 만난 일이었다고 한다. 2년간 동생을 보지 못했으니 얼마나 반가웠을까?

 

그리고 천사같은 어린 조카를 들어올리며 볼에 키스를 하는 행복한 고흐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 후 고흐는 오베르의 거처에서 열정적으로 그림 그리기에 몰두한다. 오베르 역시 아름다운 전원마을이었기 때문에 이 당시 많은 작품들을 남겼다.

 

하지만 고흐의 행복한 날도 길지 않았다.

그의 나이 37살이 되었을 때 그는 생을 마감하게 된다. 고흐가 자살을 시도하게 된 이유는 여러가지로 추정되지만 유력한 설은 테오가 당시 미술 판매상 일을 그만두면서 경제적으로 어려워지게 되는데 자신이 테오에게 커단란 짐이 되는 것에 큰 상심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테오에게 “자신이 실패한 인생을 살았다” 고 편지를 썼다.

 

그리고 1890년 7월 27일 오베르의 들판에서 가슴에 총을 쏘아 자살을 시도한다.

 

고흐가 총을 맞은 당시 즉사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 오베르에서 친해진 의사 가셰에게 응급처치를 받아 위기를 넘겼다. 가셰는 테오에게 이 소식을 곧바로 전하고 했으나, 고흐는 동생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일부러 주소를 대답하지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

 

결국 하루가 지나 테오는 형의 자해 소식을 듣고 곧바로 달려왔다.

동생은 그날 형의 침대에 같이 누웠다. 그 누구보다 형의 미술에 대한 열정과 재능을 높이 평가하고 형을 사랑했던 동생은 형의 곁에 누워 한없이 슬퍼했을 것이다. 결국 총을 쏜 지 이틀뒤 고흐는 동생 테오가 바라보는 곁에서 숨을 거두게 된다.

 

테오는 부인 요에게 쓴 편지에서 "형은 밀밭의 양지바른 곳에 누웠다오. 벌써 형이 너무나 그립소. 모든 것들이 형을 생각나게 하오." 라고 썼다.

 

기구하게도 테오 역시 형이 숨진 이후 건강이 안 좋아져 6개월 뒤 병사하고 만다.

정말 기구한 운명이다. 테오의 부인 요는 결혼 2년만에 미망인이 되고 만다. 요는 테오를 진정 사랑했고 그의 형인 고흐의 열정과 그림을 높이 평가했다. 고흐가 정신병원에 입원했을 당시 브뤼셀에서 열린 고흐의 작품 전시회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일부 받기도 했지만 본격적으로 고흐의 작품이 유명해지게 된 것은 요의 노력 덕분이다.

 

요는 고흐로부터 받았던 그림들을 정기적으로 한점씩 팔아가며 1905년에 암스테르담 시립 미술관에서 큰 전시회를 열었다. 이때 472개의 작품들이 전시되었으며 긍정적인 반응을 이끌어냈다.

 

또한 고흐와 테오가 주고받았던 편지들을 수년간 정리하여 1914년 <빈센트 반 고흐: 동생에게 보낸 편지>가 출판되어 세계인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당시 요는 "내가 그 편지안에서 찾던 사람은 빈센트가 아닌 테오였다" 라고 훗날 글을 남겼다.

 

그리고 1914년 테오의 묘를 오베르에 있는 고흐의 무덤옆에 옮겨 마침내 형제가 함께하게 되었다. 요가 죽은 뒤 고흐의 작품들은 조카 빈센트 빌럼에게 상속되었는데, 빌럼은 삼촌의 작품들을 영구히 네덜란드 정부에 맡기기로 하고 <빈센트 반 고흐 재단>을 설립하고 암스테르담에 있는 <빈센트 반 고흐 미술관>을 건축하여 오늘날 그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살아생전 여행을 좋아했던 고흐는 죽어서도 오늘날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우리에게 감동을 선사하고 있다. 37살의 짧은 생을 살며 기구하고 운명적인 삶을 살았던 반 고흐. 특히 테오와의 우정은 정말 아름다운 이야기이다. 고흐의 유명한 작품을 볼때면 그림에만 관심이 가고 그 작품을 그리게 된 배경과 고흐의 삶이 어떠했는지 몰랐는데, 이 책을 읽고 나니 화가로서의 고흐뿐만 아니라 한 시대를 살았었던 인간 고흐에 대해 알게 되었다.

 

내 생각에 고흐는 감수성이 매우 예민하고 남보다 외로움을 너무 많이 탓던 사람이었던 것 같다. 한편으로는 영양실조에 걸리고 정신병을 앓으면서도 작품 활동을 계속했던 미술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던 사람이다. 반 고흐의 아름다운 그림과 한편의 영화 같은 그의 삶에서 큰 감동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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