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다반사

역사상 최대의 사기, 농업혁명! 농업혁명은 진정 인류의 위대한 도약인가?

꿈달(caucasus) 2023. 5.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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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우리는 학교에 다니면서 인류는 크게 세 번의 위대한 혁명을 이뤄냈다고 배웠습니다.

첫째는 농업혁명, 두 번째는 산업혁명, 세 번째가 정보화 혁명입니다.

그런데, 세계적인 석학중 한 사람인 유발 하라리는 그의 저서 <사피엔스>에서 농업혁명은 인류 역사상 최대의 사기라고 주장합니다. 그의 주장은 정말 발칙하고 세간의 통념을 깨버리는 인사이트를 줍니다. 저는 요즘 다시 사피엔스를 읽고 있는데, 이 분의 글을 읽고 있으면 정말 글을 잘 쓴다, 어쩌면 이런 논리를 펼쳐낼 수 있을까? 하고 감탄하게 됩니다.

 

 

유발 하라리가 들려주는 농업혁명 이야기를 알아볼까요?

왜 유발 하라리는 농업혁명이 인류 최대의 사기라고 주장하는 것일까요?

제가 오늘 그의 주장을 요약해서 올려봅니다.

 

 

유발 하라리가 농업혁명은 사기라고 주장하는 이유

 

* 인간은 수렵채집인 생활을 하는데 적합하도록 진화했다.

* 언제부터인가 밀, 보리, 쌀, 감자 등을 재배하기 시작하면서 인간은 농경생활을 하게 되었다.

* 그러면서 고된 노동에 시달리고, 농경작업에 시간을 대부분 쏟게 되었다.

* 이러한 대가는 무엇인가?

* 단위 면적당 생산력은 증가해 인간의 개체수가 급격하게 늘어나게 되긴 했지만,

* 그 대가로 인간의 각종 질병에 걸리게 되었고, 더욱 폭력적인 사회에 노출되게 되었다.

* 한 해 농사가 망치게 되면, 많은 수의 인간들이 굶어 죽기도 했다. 그러나 수렵채집인들이라면 사는 곳을 옮기면 그만이었다.

* 또한 농업혁명 이후로 인간의 DNA 복사본의 수는 늘어나지 않고 있다. 이는 진화가 상당히 더디게 진행되고 있거나, 진화가 멈춘 셈이다.

 

👉 나의 사견: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가 농경사회를 선택한 것에는 분명 나름의 이유가 존재했을 터다. 단위 면적당 생산량의 증가는 인류의 개체수를 급격하게 늘릴 수 있었고, 이는 분명 단점도 있었지만 결국 인간 종의 생존에 더 유리하다고 판단한 결과일 것이다. 농경사회가 되면서부터 인간들의 출산율은 사망률을 앞지르기 시작했다. 농사를 짓고 자기들의 영토를 지키려면 사람이 많이 필요했으니 자손을 더 많이 나았고, 그 자손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인간들은 더 많은 농사를 지어야만 했다. 또한 이러한 농경사회로 인해 물질의 축적이 가능해졌고 이는 수렵채집인의 생활에서 오는 단점들을 커버할 수 있었다. 물론, 이로 인해 전쟁과 폭력, 계급사회의 출현, 생태계 파괴 등 부작용도 있었겠지만... 과정이 어찌되었건 농업혁명을 거치게 되면서 결국 현재 인류는 지구의 최상위 포식자로 군림하게 되었다.


한때 학자들은 농업혁명이 인간성을 향한 위대한 도약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들은 두뇌의 힘을 연료로 하는 진보의 이야기를 지어냈다. 진화는 점점 더 지능이 뛰어난 사람들을 만들어냈고, 결국 사람들은 너무나 똑똑해져서 자연의 비밀을 파악하고 양을 길들이며 밀을 재배할 수 있게 되었으며, 그게 가능해지자마자 지겹고 위험하고 종종 스파르타처럼 가혹했던 수렵채집인의 삶을 기꺼이 포기하고 농부의 즐겁고 만족스러운 삶을 즐기기 위해 정착했습니다. 여기까지가 그간의 통념적인 학자들의 주장입니다.

 

 

농업혁명이 사기인 이유

 

하지만 유발 하라리는 이러한 주장은 환상이자 사기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시간이 흘러도 사람들이 더욱 총명해졌다는 증거는 없기 때문입니다. 수렵채집인들은 농업혁명 훨씬 이전부터 자연의 비밀을 알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냥하는 동물과 채집하는 식물을 잘 알고 있어야 생존할 수 있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농업혁명은 안락한 새 시대를 열지 못했습니다.

그러기는커녕, 농부들은 대체로 수렵채집인들보다 더욱 힘들고 불만스럽게 살았습니다. 수렵채집인들은 그보다 더 활기차고 다양한 방식으로 시간을 보냈고 기아와 질병의 위험이 적었습니다. 농업혁명 덕분에 인류가 사용할 수 있는 식량의 총량이 확대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여분의 식량이 곧 더 나은 식사나 더 많은 여유시간을 의미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인구폭발과 방자한 엘리트를 낳았습니다. 평균적인 농부는 평균적인 수렵채집인보다 더 열심히 일했으며 그 대가로 더 열악한 식사를 해야만 했습니다. 농업혁명은 역사상 최대의 사기입니다.

 

 

Portrait of Homo sapiens growing wheat under the scorching sun, renaissance art style / MS 빙&DALL.E 2

 

 

이렇게 된 것은 누구의 책임일까요?

왕이나 사제, 상인은 아니었습니다. 범인은 한 줌의 식물 종, 곧 밀과 쌀, 감자였습니다. 이러한 작물들이 호모 사피엔스를 길들였지, 호모 사피엔스가 이들을 길들인 게 아니었습니다.

 

 

예를 들어 밀을 생각해봅시다.

1만 년 전 밀은 수많은 잡초 중 하나일 뿐이었고, 중동의 일부 지역에만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불과 몇천 년 지나지 않아 세계 모든 곳에서 자라게 되었습니다. 생존과 번식이라는 진화의 기본적 기준에 따르면 밀은 지구 역사상 가장 성공한 식물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잡초에 불과했던 밀이 지구 어디서나 자라는 존재가 되었을까요?

밀은 호모 사피엔스를 자신의 이익에 맞게 조작함으로써 그렇게 해낼 수 있었습니다.

약 1만 년 전까지 이 유인원은 사냥과 채집을 하면서 상당히 편안하게 살고 있었으나, 이후 밀을 재배하는 데 점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기 시작했습니다. 2천 년도 채 지나지 않아 전 세계 많은 지역의 인간은 동이 틀 때부터 해가 질 때까지 밀을 돌보는 것 외에는 거의 아무 일도 하지 않게 되었지요.

 

 

 

그런데 밀을 키우는 일은 굉장히 어렵습니다.

많은 노동력을 요구합니다. 밀은 바위와 자갈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사피엔스는 밭을 고르느라 등골이 휘었습니다. 밀은 다른 식물과 공간, 물, 영양분을 나누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인간은 타는 듯한 태양 아래 온종일 잡초를 뽑는 노동을 했습니다.

 

 

밀은 병이 들기 때문에, 사피엔스는 해충과 마름병을 조심해야 했습니다.

밀은 자신을 즐겨 먹는 토끼와 메뚜기 떼에 대한 방어책이 없었기 때문에, 농부들이 이를 막아야 했습니다. 밀은 목이 말랐기 때문에, 인간들은 샘과 개울에서 물을 끌어다 댔습니다. 밀은 배가 고팠기 때문에, 사피엔스는 밀이 자라는 땅에 영양을 공급하기 위해 동물의 변을 모아야 했습니다.

 

 

때문에 수렵채취인의 생활에 알맞게 진화했던 인간은 밀을 재배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척추와 무릎, 목과 발바닥의 장심(발바닥의 오목한 부분)에 큰 대가를 치렀습니다. 고대 유골을 조사한 바에 따르면, 농업으로 이행하면서 디스크 탈출증, 관절염, 탈장 등 수많은 병이 생겨났습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밀을 재배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농업에 쏟아붙게 되면서 인간의 생활방식은 영구히 바뀌게 되었습니다. 즉, 인간이 밀을 길들인 것이 아니다. 밀이 인간을 길들인 셈입니다. ‘길들이다. 가축화하다’라는 뜻의 단어 ‘domesticate’는 ‘집’이라는 뜻의 라틴어 ‘domus’가 어원입니다. 집에서 사는 존재는 누구인가요? 밀이 아니지요, 호모 사피엔스입니다.

 

 

 

이렇게 인간을 죽도록 고생시키면서 과연 밀은 얼마나 인간에게 득이 되었을까요?

밀은 더 나은 식사를 제공한 것이 아닙니다. 인류는 수렵채집인 생활을 하면서 아주 다양한 음식을 먹고 사는 잡식성 유인원이었습니다.

 

 

농업혁명 이전 식사에서 곡물이 차지하는 비중은 아주 적었습니다. 곡류를 중심으로 하는 식단은 미네랄과 비타민이 부족하고 소화시키기 어려우며 치주 조직에 해롭습니다. 밀은 사람들에게 경제적 안정을 제공하지도 않았습니다. 농부의 삶은 수렵채집인의 삶보다 불안정했습니다. 수렵채집인은 수십 종의 먹을거리에 의지해 생존했기 때문에 설령 저장해둔 식량이 없더라도 어려운 시절을 몇 해라도 견뎌나갈 수 있었습니다. 특정한 종을 손에 넣기가 힘들어지면 다른 종들을 사냥하고 채집할 수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농경사회가 되면서부터는 그럴수가 없었습니다.

이때부터는 대부분의 칼로리를 극소수의 작물을 통해 섭취해야만 했습니다. 오랜 세월 이들 사회는 밀이나 감자, 쌀 등 몇 종류의 작물에 의존했습니다. 그래서 비가 내리지 않거나, 메뚜기 떼가 덮치거나, 곰팡이가 주식인 작물을 감염시키면, 농부들은 수천 수백만 명씩 죽어나갔습니다.

 

 

밀은 인간 사이의 폭력에 대한 안전망을 제공하지도 않았습니다.

초기 농부들은 수렵채집인 조상보다 더하진 않았을지언정 그 못지않게 폭력적이었습니다. 농부들은 재산이 더 많았으며 경작할 토지를 필요로 했습니다. 이웃의 습격으로 목초지를 잃는 것은 생사가 걸린 문제였기에, 타협의 여지가 매우 적었습니다. 수렵채집인 무리는 강력한 라이벌에게 몰리면 보통 다른 장소로 옮길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농경사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농촌 마을이 강력한 적의 위협을 당할 경우, 후퇴는 곧 목초지와 집, 곡물창고를 포기해야 한다는 뜻이었습니다. 많은 경우 이런 피난민들은 굶어 죽었습니다. 그러므로 농부들은 그 자리에서 버티면서 최후까지 싸우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많은 인류학적, 고고학적 연구는 부락이나 종족을 넘어서는 정치적 틀이 없는 단순 농경사회에서 사망의15퍼센트가 인간의 폭력 탓임을 시사합니다. 남성의 경우에는 폭력적 사망이 25퍼센트에 이릅니다. 오늘날 뉴기니를 보면, 농경 부족사회인 다니족에서 남성 사망의 30퍼센트가 폭력 때문이고, 엥가족에서는 35퍼센트가 폭력 때문입니다. 에콰도르의 경우 와오란족 성인의약 50퍼센트가 다른 인간의 폭력으로 죽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도시, 왕국, 국가 등 보다 큰 사회적 틀이 발전하면서 인간의 폭력은 통제받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크고 효율적인 정치체제를 구축하는 데는 수천 년이 걸렸지요. 최초의 농부들은 마을에 사는 생활양식 덕분에 야생동물이나 비, 추위로부터 보호받는 등 어느 정도 직접적인 혜택을 누렸습니다.

 

 

 

하지만 평범한 개인의 입장에서 보면 이익보다 손해가 더 컸을 것입니다.

오늘날 번영사회에사는 사람들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요즘 우리는 풍요와 안전을 누리고 있고 그 풍요와 안전은 농업혁명이 놓은 기초 위에 세워진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농업혁명이 놀라운 개선이라고 가정합니다. 하지만 수천 년의 역사를 오늘날의 관점에서 판단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이보다 훨씬 더 대표성이 있는 관점은 1세기 무렵 중국에서 아버지가 농사에 실패해 영양실조로 죽어가는 세 살짜리 딸의 관점입니다. 아이는 과연 “나는 영양실조로 죽어가지만, 앞으로 2천년 내에 사람들은 먹을거리가 풍부한 세상에서 에어컨이 딸린 큰 집에서 살게 될 테니 나의 고통은 가치 있는 희생이다” 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밀은 영양실조에 걸린 중국 소녀를 비롯한 농업종사자들에게 무엇을 주었을까?

사람들 개개인에게 준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호모 사피엔스 종에게는 무언가를 주었습니다. 밀 경작은 단위 토지당 식량생산을 크게 늘렸고, 그 덕분에 호모 사피엔스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수 있었습니다.

 

 

기원전 13000년경, 사람들이 야생식물을 채취하고 야생동물을 사냥하면서 먹고살던 시기에 팔레스타인의 여리고 오아시스 주변 지역이 지탱할 수 있는 인구는 기껏해야 1백 명 정도의 건강하고 영양 상태가 비교적 좋은 방랑자들이었을 것입니다.

 

 

기원전 8500년 야생식물이 밀에게 자리를 내어준 뒤, 이 오아시스에는 1천 명이 사는 마을이 생겼습니다. 마을은 크지만 집은 다닥다닥 붙어 있었고 과거보다 많은 사람이 질병과 영양실조로 허덕였습니다.

 

 

 

어느 종이 성공적으로 진화했느냐의 여부는 굶주림이나 고통의정도가 아니라 DNA 이중나선 복사본의 개수로 결정됩니다. 한 회사의 경제적 성공은 직원들의 행복이 아니라 오직 은행잔고의 액수로만 측정됩니다. 마찬가지로 한 종의 진화적 성공은 그 DNA의 복사본 개수로 측정됩니다. 만일 더 이상의 DNA 복사본이 남아 있지 않다면 그 종은 멸종한 것입니다. 돈이 없는 회사가 파산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만일 한 종이 많은 DNA 복사본을 뽑낸다면 그것은 성공이며 그 종은 번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1천벌의 복사본은 언제나 1백 벌보다 좋습니다. 결국 인간의 DNA 복사본의 개수는 농경사회 진입 이후 늘어난게 아니라 그대로라는 점을 볼 때 인간의 진화는 분명 더디게 진행되고 있거나 혹은 진화가 멈춘 것이라는 뜻입니다.

 

 

농업혁명의 핵심이 이것입니다.

더욱 많은 사람들을 더욱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 있게 만드는 능력. 하지만 이런 진화적 계산법에 왜 개인이 신경을 써야 하는가? 제정신인 사람이라면 호모 사피엔스 DNA 복사본의 개수를 늘리기 위해 삶의 질을 포기할 사람이 있겠는가? 그런 거래에 동의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농업혁명은 결국 덫이었습니다.


끝으로 한마디만 더...

이렇게 농경사회가 단점이 많았다면, 다시 수렵채집인의 생활로 돌아가면 그만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할 수 있는데요. 유발 하라리의 책에서는 인간의 몇 대가 지나게 되면 후손들은 선조들이 어떻게 생활했었는지를 까먹게 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농경사회가 시작되고 나서 세대가 바뀔수록 선대들의 생활방식을 전수받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아버지가 그랬고, 할아버지가 그랬고, 증조 할아버지, 고조 할아버지가 농사를 지어 먹고 살았으니까 나도 당연히 농사가 생존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은 농경사회로 진입하게 되면서부터는 자연스럽게 수렵채집인 생활을 하던 그 옛날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오늘은 유발 하라리가 쓴 <사피엔스>라는 책에서 소개하는 농업혁명의 사기에 대해서 알아보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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