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이 되는 경제 이야기

세계 권력의 중심은 어떻게 유럽으로 이동하게 되었는가?

꿈달(caucasus) 2023. 9.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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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대서양의 큰 섬에서 온 사람들이 호주 남쪽의 큰 섬을 정복했다는 사실은 역사상 가장 기괴한 사건 중 하나다.

제임스 쿡의 탐험이 있기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영국 제도와 서유럽 전반은 지중해 세계에서 멀리 떨어진 벽지에 지나지 않았다. 중요한 일이 일어난 적이 거의 없는 곳이었다.

 

* 제임스 쿡(1728년~1779년)

> 1768년 8월 26일 ‘캡틴 쿡’이라는 별명으로 더 잘 알려진 영국의 탐험가이자 항해가 제임스 쿡 선장이 선원 94명과 함께 인데버 호에 올라 1차 대 항해에 나섰다. 콜럼버스, 마젤란 등과 함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장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쿡 선장은 일반 수병에서 함장까지 오른 인물로 1차 항해로 호주와 뉴질랜드 등을 비롯한 태평양 지역 전체를 본격적으로 세계에 알렸다. 그러나 3차 대 항해에서 하와이 원주민과의 충돌로 창에 찔려 허망한 죽음을 맞고 말았다.

 

 

제임스 쿡 선장의 초상화, 태평양 지역을 세계에 알렸으나 한편으로는 제국주의 식민지 정책에 일조하기도 했다

 

 

근대 이전 유럽에서 유일하게 중요한 제국이었던 로마 제국도 대부분의 부를 북아프리카, 발칸, 중동지방에서 얻었다. 로마에게 서유럽은 초라하고 황량한 서부에 지나지 않았고, 광물과 노예를 제외하면 기여하는 바가 거의 없는 곳이었다.

 

 

북유럽은 워낙 황량하고 미개해서 심지어 정복할 가치조차 없었다. 유럽이 중요한 군사, 정치, 경제, 문화 발전의 온실이 된 것은 15세기 말에야 생긴 일이었다. 1500년에서 1750년 사이 서유럽은 세를 얻고 ‘외부 세계(남미와 북미)’의 주인이 되었다.

 

 

하지만 심지어 그때도 유럽은 아시아 강대국들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유럽이 어찌어찌 미 대륙을 정복하고 바다의 패권을 획득한 것은 주로 아시아의 강대국들이 그런 지역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은 덕분이었다. 근대 초기는 지중해의 오토만 제국, 페르시아의 사파위 제국, 인도의 무굴 제국, 중국의 명과 청 왕조의 황금시대였다.

 

 

이 제국들은 영토를 크게 확장했으며, 인구와 경제가 전대미문으로 성장했다. 1775년 아시아는 세계 경제의 80퍼센트를 차지했다. 인도와 중국의 경제 규모를 합친 것만으로도 세계 총생산의 3분의2에 이르렀다. 이에 비해 유럽은 경제적 난쟁이었다.

 

 

 

세계의 권력 중심이 유럽으로 이동한 것은 1750 ~ 1850년사이에 이르러서다.

이때 유럽인들은 일련의 전쟁에서 아시아 강대국들에게 모욕을 안기고, 그 영토의 많은 부분을 점령했다. 1900년이 되자 유럽은 세계 경제와 대부분의 땅을 확고하게 지배했다. 1950년 서유럽과 미국을 합친 생산량은 세계 전체 생산량의 절반이 넘었고, 중국이 차지하는 몫은 5퍼센트로 축소되었다.

 

 

유럽의 방패 아래 새로운 세계 질서와 세계 문화가 등장했다.

요즘 사람들은 당사자들이 통상 인정하는 것보다 훨씬 더 심한 수준으로 유럽식 복장을 하고, 유럽식 사고방식과 취향을 지니고 있다. 말로는 격렬한 반유럽 정서를 드러낼지도 모르지만, 지구상의 거의 모든 사람은 정치, 의학, 전쟁, 경제에 대해 유럽적 시각을 견지하며, 유럽식으로 작곡된 곡에 유럽 언어로 된 가사가 붙은 음악을 듣는다. 오늘날 급성장하는 중국 경제, 머지않아 세계 1위 자리를 탈환할지도 모르는그 나라의 경제도 유럽식 생산 및 금융 모델 위에 건설되었다.

 

 

어떻게 유라시아 변방에 있던 이들은 그 오지에서 뛰쳐나와 전세계를 정복할 수 있었을까?

보통은 그 공의 큰 부분을 유럽 과학자들에게 돌린다. 물론 1850년 이래 유럽의 세계 지배가 군사, 산업, 과학 복합체와 기술의 묘기에 크게 의존했다는 점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근대 후기의 성공한 제국들은 모두가 기술적 혁신을 이루리라는 희망을 품고 과학연구를 장려했으며, 많은 과학자들은 제국주의 주인을 위해 무기, 의학, 기술을 개발하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쏟았다.

 

 

아프리카인 적을 맞이한 유럽 군대가 흔히 했던 말은 “뭐가 오든 상관없다. 우리에게는 기관총이 있고 그들에게는 없다”였다. 민간기술의 중요성도 군사기술 못지않았다. 통조림은 병사들을 먹여 살렸고, 철도와 증기선은 군대와 장비를 수송했다. 그러는 동안 새로운 의약품이 병사와 선원과 기관차 엔지니어들을 치료했다. 병참 부문에서의 이 같은 진보는 유럽인의 아프리카 정복에 기관총보다 더욱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1850년 이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군사, 산업, 과학 복합체는 아직 유년기였고, 과학혁명의 과실은 여물지 않았으며, 유럽과 아시아와 아프리카 강대국들 사이의 기술 격차는 크지 않았다.

 

 

1770년 제임스 쿡은 분명 호주 원주민보다 훨씬 뛰어난 기술을 지녔지만, 그렇기로는 중국인이나 오토만인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왜 호주를 탐험하고 식민지로 만든 사람은 제임스 쿡 선장이었을까? 왜 왕롱안 선장이나 후세인 파샤 선장이 아니었을까? 더욱 중요한 문제로, 만일 1770년 유럽인들이 무슬림, 인도인, 중국인보다 기술적인 우위를 점하지 못했다면 어떻게 그 다음 세기에 자신들과 나머지 온 세상 사이에 그렇게 큰 격차를 만들 수 있었을까?

 

 

 

어째서 군사, 산업, 과학 복합체는 인도가 아니라 유럽에서 꽃피었을까?

영국이 약진했을 때 어째서 프랑스, 독일, 미국은 재빨리 따라가고 중국은 뒤처졌을까? 산업화된 국가와 그렇지 못한 국가 사이의 격차가 명백한 정치경제적 요인이 되었을 때, 어째서 러시아, 이탈리아, 호주는 그 격차를 줄이는 데 성공했고 페르시아, 이집트, 오토만 제국은 실패했을까?

 

 

누가 뭐래도 1차 산업혁명기의 기술은 상대적으로 단순한 편이었다.

증기기관과 기관총을 만들고 철로를 놓는 것이 중국인이나 오토만인에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었을까? 세계 최초의 상업용 철로가 개통된 것은 1830년 영국에서였다. 1850년이 되자 서구 국가에는 4만 킬로미터의 철로가 종횡무진 달리고 있었다. 이에 비해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철로는 총연장 4천 킬로미터에 불과했다. 1880년 서구에 깔린 철로는 35만 킬로미터가 넘었지만, 나머지 세계의 철로는 35,000킬로미터에 불과했다(이 중 대부분은 영국이 인도에 놓은 것이었다).

 

 

중국에 철로가 놓인 것은 1876년에 이르러서였다. 길이 24킬로미터로 유럽인이 건설했는데, 중국 정부는 이듬해 이것을 파괴했다. 1880년 중국 제국에선 단 하나의 철도 운영되지 않았다. 페르시아에 철도가 처음 놓인 것은 1888년에 들어와서였다. 테헤란과 남쪽으로 10킬로미터 떨어진 무슬림 성지를 연결하는 공사였는데, 건설과 운영은 벨기에 회사가 맡았다. 1950년 페르시아에 놓인 철로는 총연장 2,500킬로미터에 불과했다. 국토 면적이 영국의 일곱배인 나라로선 형편없이 적은 수치다.

 

 

중국인과 페르시아인에게 부족했던 것은 증기기관 같은 기술적 발명이 아니었다.

(그거라면 공짜로 베끼거나 사들일 수도 있었다). 이들에게 부족한 것은 서구에서 여러 세기에 걸쳐 형성되고 성숙한 가치, 신화, 사법기구, 사회정치적 구조였다. 이런 것들은 빠르게 복사하거나 내면화할 수 없었다. 프랑스와 미국이 재빨리 영국의 발자국을 뒤따랐던 것은 가장 중요한 신화와 사회구조를 이미 영국과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중국인과 페르시아인은 사회에 대한 생각과 사회의 조직 방식이 달랐던 탓에 그렇게 빨리 따라잡을 수 없었다.

 

 

이런 설명은 1500년에서 1850년 사이 시기를 새롭게 조명하게 한다. 이 시기 유럽은 아시아 열강보다 기술, 정치, 군사, 경제의 우위를 누리지 못했다. 그럼에도 독창적 잠재력을 구축했고, 1850년경이 되자 그 중요성은 갑자기 뚜렷해졌다. 1750년에 유럽과 중국, 이슬람 세계가 외관상 동등해 보였던 것은 신기루일 뿐이었다.

 

 

매우 높은 탑을 세우고 있는 두 건축가를 상상해보자. 한 사람은 나무와 진흙 벽돌을, 다른 사람은 강철과 콘크리트를 재료로 쓴다. 처음에는 두 방법 사이에 별로 차이가 없어 보인다. 두 탑이 모두 비슷한 속도로 비슷한 높이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단 결정적 문턱을 지나면, 나무와 진흙은 하중을 버티지 못하고 무너진다. 이에 비해 강철과 콘크리트는 시야가 미치는 한 층층이 계속 올라간다.

 

 

근대 초기에 유럽은 어떤 잠재력을 개발했기에 근대 후반 세계를 지배할 수 있었을까?

이 질문에는 서로 보완적인 두 가지 답이 존재하는데, 바로 현대 과학과 자본주의다. 유럽인은 기술적인 우위를 누리기 전부터도 과학적이고 자본주의적인 방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습관이 있었다. 그러다가 기술의 노다지가 쏟아지기 시작하자, 유럽인들은 다른 누구보다 그것을 잘 부릴 수 있었다. 따라서 과학과 자본주의가 유럽 제국주의가 21세기 유럽 이후 세상에 남긴 가장 중대한 유산이라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유럽과 유럽인은 더 이상 세상을 지배하지 않지만, 과학과 자본의 힘은 나날이 강력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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